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천홍석 기자
  • 승인 2018.04.17 2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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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一百番) 곳쳐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
님향(향)imagefont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 줄이 이시라"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힘 있는 권세가들이 산을 경계로 강을 경계로 땅을 다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명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다던 고려말 상황이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난세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방책이 필요했을까 ?

무너져가는 종묘사직을 위한 절의였을까 ? 아니면 민심을 추스르고 백성들이 살만한 마음이 생기도록 항산을 보장해 주는 조치였을까 ?

두 갈래 길에서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를 택했고 정도전은 백성들의 항산(恒産)을 보장하기 위한 공업(功業)을 택했다.

“이때 태조(이성계)의 공업(功業)은 날로 성하여져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려, 그 형세가 태조가 끝까지 남의 신하 노릇하기에는 어렵게”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의 개국을 끝까지 반대하던 정몽주의 “음모가 더욱 드러나자 이방원은 정몽주를 초청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何如如彼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 萬壽山原頭葛榮綴亦何如

우리도 이와 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하며 정몽주를 떠본다.

그러자 정몽주 역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

라고 응수한다.

정몽주는 결국 “자신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해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 하” 다 “절의에 죽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정몽주는 간신(姦臣)에 불과했다.(태조1년 12월 16일) 간신 정몽주가 화려하게 충신으로 되살아난 것은 하여가로 회유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였다.

권근은 태종이 즉위하자 “수성(守成)할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전대(前代)에 절의를 다한 신하를 상 주어...후세 인신(人臣)의 절의를 장려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태종은 곧 정몽주의 절의를 포상했다.(태종 1년 1월 14일)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조선 건국에 아무런 공로도 없는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가 충신의 화신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태종은 권력을 잡은 후 권력에 복종하는 ‘의리의 사나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되는 조선정치 사상사는 태종의 전략적 포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연려실기술은 절의만을 숭상하지 않는다. 선조가 “몽주는 고려 사람”이라고 하고, 한강 정구가 “남명 조식이 정포은의 진퇴에 관해 의심을 했고, 내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은 가소롭다”고 하듯이 연려실기술은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신념윤리에 따라 의리를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백성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책임윤리로 무장한 경세가도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절의는 숭고한 가치이지만 누구만을 위한 절의는 필요 없다.

그보다는 국민들의 팍팍한 현실이 더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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