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무기 발명가, 장군 최무선
화약무기 발명가, 장군 최무선
  • 용인종합뉴스
  • 승인 2018.08.1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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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이 태어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4세기 초 고려 충숙왕 연간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동순은 벼슬아치의 녹봉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최고 책임자인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냈으며 집안은 그리 빠지지 않았다. 그는 경상도 영주(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수도 개경으로 올라왔다고 여겨진다.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의 무기 발명가이며 장군이다. 중국 원나라 사람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통 · 화포 · 화전 따위를 만들었으며, 이를 이용해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그는 벼슬자리에 나와서도 병기를 만드는 군기감 자리를 얻은 듯하다. 이때 그는 또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서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않아 혼란한 상태였고, 일본도 다이묘(일본의 봉건 영주)들이 함부로 날뛰어 나라 안이 혼란스러웠다. 또 고려도 말기 증상을 보이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명령계통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군사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왜구들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났다. 규슈와 쓰시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은 남해 일대에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심지어 황해의 조운선(漕運船, 세금으로 낸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배)을 빼앗아 끌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구들은 더욱 날뛰어 수도 개경의 바로 코밑이라 할 강화도에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현자총통
현자총통

이때에 왜구를 물리칠 방법을 찾던 최무선은 바로 화약제조를 생각해 냈다. 그는 과학기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중국과 원나라에서는 전쟁에 화약을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고려에서도 1101년(숙종 9) 여진을 정벌할 때, 별무반(別武班)에 특수 부대인 발화대(發火隊)를 두었고,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에도 화구(火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각주1)
하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화약은 너무나 적은 분량이었다. 화약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했는데 오랫동안 개량을 거듭한 끝에 11세기 이후에 와서야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화약은 14세기에 들어서야 유럽으로 유출되었다.

사실 최무선은 무슨 목적에서인지 젊을 때부터 중국어를 익혀 두었는데, 이때 아주 요긴하게 써먹은 것이다. 최무선은 그가 일러 준 대로 화약을 만들어 일꾼을 시켜 실험해 보았다. 그 성능은 아주 좋았다. 그는 너무나 감격해 하며 기뻐했다. 그는 화약제조에 성공했다는 것을 조정에 알리고, 본격적으로 화약제조를 전담할 기구를 설치하자고 건의했다.

이렇게 해서 조정에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새로 설치하게 되었다. 화통도감이 설치되자, 그는 그 책임자인 제조가 되었고 화약을 사용해서 온갖 신무기를 만들어 냈다. 《태조실록》에는 그의 발명품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화석포 · 화포 · 신포와 화통 · 화전 · 철령전 · 피령전 · 질려포 · 철탄자 · 천산오룡전 · 유화 · 주화 · 촉천화 등의 이름으로 만들어지자,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들 무기의 용도와 성능은 설명이 없어서 알 길은 없지만 대포와 불화살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화포의 이름을 대장군포 · 이장군포 · 삼장군포 등으로 정하고 18종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아무튼 많은 군사용 신무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뒤에 그는 화약을 이용하는 새 전함을 설계해서 만들어 냈는데, 그 구조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게 3년 동안 그는 무기와 전함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화약 무기는 아무나 다룰 수 없기에 이를 다루고 운반하는 특수부대인 방사군(放射軍)을 신설하는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벌인 일이었다.

1380년 가을, 마침내 왜구가 300여 척의 해적선(500여 척이라고도 함)을 이끌고 금강 입구의 진포에 밀어닥쳤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무선이 만든 화약을 실험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그를 도원수 심덕부 밑의 부원수로 삼아 내려보냈다. 한낱 화약기술자이자 무기발명가가 전투부대의 부사령관이 되어 출전하게 된 것이다. 최무선이 금강 입구에 당도해 보니 왜구들은 밧줄로 배를 서로 묶어 두고 육지로 올라와 멋대로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최무선이 이끌고 간 배 100여 척에는 화약병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는 직접 화약병기(화전)에 불을 붙여 왜구의 해적선을 향해 쏘아 댔다. 해적선에 불이 붙었지만 왜구는 배를 움직여 달아날 수도 없었다. 평소처럼 배를 한데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적선은 거의 다 불에 타 버렸고 배에 타고 있던 왜구들도 거의 전멸했다. 이 불화살이 고려판 ‘미사일’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때의 화약병기 사용은 세계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꼽힌다.

왜구들은 크게 놀랐다. 불을 토해 내며 날아오는 불화살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 바다로 달아날 수 없었다. 육지에서 노략질하던 무리와 배에서 겨우 육지로 올라온 무리들은 계속 도망쳐서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상도의 지리산을 넘나들며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이해 9월 지리산 언저리인 운봉에 집결했다.

미사일 신기전
미사일 신기전

이때 이성계가 출전해 왜구를 섬멸하여 이른바 황산대첩을 기록했다. 이성계는 이때의 공에 힘입어 군사권을 틀어쥐는 실력자로 떠올랐는데, 따지고 보면 최무선의 진포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운봉에는 황산대첩비 따위를 세워, 이성계의 전공을 기리고 있으면서도 군산의 진포 자리인 옛 금강 입구의 나루 일대에는 최무선을 기리는 어떤 표시도 없다.
아무튼 최초의 화약병기 사용으로 이렇게 멋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동안 이씨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기록에는 “그가 늙어서 등용되지 않았다”고 했으며, 허울뿐인 검교참찬이라는 벼슬만 내려 주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4년 뒤, 그는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늦게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죽을 무렵 아들 해산(海山)의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죽기 직전 아내에게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한 권을 전해 주며 “이 책을 고이 간직했다가 이 아이가 크면 전해 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내는 아들이 15세가 되어 문자를 익히자, 아버지의 유언을 일러 주며 책을 전했다. 최해산이 1년쯤 이 책을 통해 화약제조법을 익히고 있을 무렵에 태종이 왕이 되었다.

이때 신임이 두텁던 권근이 목화를 보급한 문익점과 화약을 제조한 최무선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 아들들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최해산은 조정에 나와 벼슬했고, 뒷날 군기시 소감이라는 벼슬을 얻어 화약제조의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화약은 불꽃놀이에서나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최해산은 더욱 그 비법에 따라 화약병기를 만드는 데에 힘을 쏟았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화약병기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계속 새로운 병기를 발명하게 했는데,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이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고 한다. 최무선이 화약제조에 성공한 뒤 한때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약 60여 년 동안 고려와 조선의 화약을 이용한 병기는 획기적인 발전을 보았다.

세종 때에는 이 화약병기에 힘입어 북쪽으로는 야인을 정벌해 국경지대의 안전을 이룩했고, 남쪽으로는 쓰시마를 정벌하거나 왜구를 회유해 그 노략질을 막았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난 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문약에 빠진 벼슬아치들 탓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유산이 있더라도 이를 계속 발전시키지 못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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