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東醫寶鑑)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허준
  • 천홍석 기자
  • 승인 2018.08.1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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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東醫寶鑑) 허준

자는 청원(淸 源), 호는 구암(龜 巖), 본관은 양천(陽 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 醫 寶 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 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 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하지만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이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으며, 또 의관으로 나아갔는지를 일러주는 자료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관직으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시기로 나뉜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 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 國 大 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 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 聖 功 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 川)의 읍호(邑 號)를 받아 양평군(陽 平 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 祿 大 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 國 崇 祿 大 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 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 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 評)도 존재했다.

동의보감
동의보감

허준은 어의로 재직하면서 내의원의 의학서적 집필을 도맡았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8종이 있으며, 크게 네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종합 임상의서의 집필로, 『동의보감』(1613)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일상생활에 요긴한 한글 번역이 딸린 의서로,『언해태산집요(諺 解 胎 産 集 要)』·『언해구급방(諺 解 救 急 方)』·『언해두창집요(諺 解 痘 瘡 集 要)』(이상 1601) 등이 그것이다. 책은 각각 아이의 해산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급 상황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소아전염병인 천연두에 대한 의학적 대응을 실었다. 최근에 연대 미상인『언해납약증치방(諺 解 臘 藥 症 治 方)』이 허준의 저작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가정상비약인 납약을 올바로 쓰는 지침을 담고 있다.

셋째■ 전염병 전문의서로, 『신찬벽온방(新 纂 辟 溫 方)』·『벽역신방(辟 疫 神 方)』(이상 1613)의 편찬이 그것이다. 『신찬벽온방』은 열성 질환인 온역(瘟 疫: 오늘날의 급성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벽역신방』은 1613년 국내에서 첫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넷째■ 학습용 의학교재인데, 허준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 圖 方 論 脈 訣 集 成)』(1581)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典 醫 監)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책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허준의 책 중 가장 주목할 책은『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이 책은 왕명으로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아 1613년(광해 5)에 출간되었다. 애초에는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 유의(儒 醫) 정작(鄭 碏), 다른 어의인 양예수(梁 禮 壽), 김응탁(金 應 鐸), 이명원(李 命 源), 정예남(鄭 禮 男) 등 5인의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서 허준이 단독으로 책임을 맡아 책을 완성 시켰다.

1608년(선조 41) 유배 이후 허준은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집필해냈다. 허준은 양생(養 生)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의 분량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 회복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의학의 제공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질병사의 관점에서 볼 때, 『벽역신방』도 크게 주목을 끈다. 허준은 성홍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 미지(未 知)의 병이 홍역을 비롯한 유사한 질환과 구별되는 병임을 밝혔다.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 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 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통일을 가능하게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동의보감』은 출간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2005년 3월에는 허준박물관이 개관되기도 했으며,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과 같이 나누게 되었으며, 매년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지자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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