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어린 조카 끌어내리고 왕좌 차지
세조, 어린 조카 끌어내리고 왕좌 차지
  • 용인종합뉴스
  • 승인 2020.09.19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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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묘
세조의 묘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8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다. 문종이 형이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동생이며, 단종은 조카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고쳐서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다시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졌다.

세종 말년인 1445년(세종 27)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어렸을 때는 민가에서 자랐는데, 도량이 넓고 활과 말을 좋아했다.

세종은 일찍이 세조의 남다른 기질을 알아보고 아꼈다. 세종은 세자 섭정을 실시하면서 대군들도 정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결국 이것이 여러 대군들을 비롯한 종친 세력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수양대군은 여전히 정사에 참여했으며, 특히 문종을 도와《신진법》을 완성하기도 했다.

한편 몸이 약했던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인 세자 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문종의 고명을 받은 의정부 대신들과 안평대군, 종친 세력의 수장 격인 수양대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의정부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결탁한 이유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가장 컸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호방한 무인의 기질이 있었던 수양대군과 달리 학문과 예술에 밝아서 고매한 학식을 지닌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수양대군의 주변에 유독 무인과 건달 들이 모여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린 왕 단종이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동안 먼저 정권을 잡은 사람은 안평대군이었다. 안평대군은 의정부 대신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한편 수양대군은 1452년(문종 2)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것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권람, 한명회 등의 야심가들이 수양대군의 주변에서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일부 의정부 대신들의 인사권 장악으로 요직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집현전 학사 출신 신료들도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정인지, 신숙주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수양대군과 그의 일파는 1453년(단종 1) 10월에 마침내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른바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왕정을 문란하게 했으니 이를 역모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왕의 재가도 없이 먼저 김종서 등을 격살한 후 이를 통보했다.

또한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어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안평대군 역시 유배시킨 후 처형했다.

과거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이복동생들은 죽였어도, 동복형제들만은 극형을 면하게 했던 것과 달리 수양대군은 친동생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계유정난으로 정적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 겸 이·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내정은 물론 병권까지 모두 장악한 것이다.

당장 단종을 왕위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모든 권력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힘없는 어린 왕 단종은 그저 숙부인 수양대군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도 오래가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우의정 한확(韓確) 등을 앞세워 기어이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냈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1455년(단종 3) 윤 6월 왕위에 올라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1428년(세종 10)에 윤번(尹璠)의 딸과 혼인했으며, 윤씨 부인은 세조가 등극한 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되었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는 1455년(세조 즉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만인 1457년(세조 3)에 죽었으며, 둘째 아들이 세조의 뒤를 이어 예종이 되었다.

이 밖에 세조는 한 명의 후궁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훈구파의 형성과 단종 복위 운동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직후 세조는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측근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록했다.

정인지, 한확, 한명회, 권람, 홍달손 등이 1등공신에, 신숙주, 홍윤성(洪允成) 등은 2등공신에 올랐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할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을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했다. 이들 공신들은 이후에도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며 계속 새로운 공신 자격을 얻었다.

 

전제정치를 펼친 세조의 신임을 얻은 측근 공신들은 중앙 권력을 장악하며 훈신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세조 조부터 성종 조까지 8번 공신이 책봉되었는데 이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훈구파라고 한다. 이들은 공신의 지위를 이용해 막강한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

 

세조와 측근 훈신 세력에 의한 중앙집권적 정치는 권력의 중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양반관료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단종 즉위 후 고명대신의 전횡에 반발하여, 계유정난 당시 세조의 편에 섰던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은, 또다시 자신들을 소외시키는 세조와 훈신 세력들의 측근 정치에 불만을가졌다.

성삼문, 박팽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성삼문은 정난공신 3등에 봉해지는 등 계유정난에 적극 협조 했으나, 결국 자신들의 뜻을 무시하고 전제정치를 펼치는 세조에게 큰 반감을 가졌다.

 

결국 성삼문을 비롯한 일부 집현전 학사들은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정치적 모반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세조와 세자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다.

1456년(세조 2), 세조가 명나라 사신들을 맞아 크게 연회를 열기로 했다.

이때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별운검으로 뽑혔다.

칼을 차고 왕과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였다.

이들은 이것을 세조를 제거할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암살 계획은 뜻하지 않은 복병으로 무산되었다. 세조가 연회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성삼문 등이 모반을 꾀했던 사실은 오래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의정부 우찬성인 정창손(鄭昌孫)의 사위 김질(金礩)이 밀고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성균사예 김질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 정창손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했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 성삼문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했습니다.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이 창덕궁의 북쪽 담장 문을 열고 이유(李瑜, 금성대군)의 구가(舊家)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 등의 헌책(獻策)에 의한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왕을 좁은 곳에다 두고, 한두 사람의 역사(力士)를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과 세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은 북경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했고, 우의정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 신숙주, 권람, 한명회 같은 무리를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해 상왕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 했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 하위지, 유응부도 알고 있다.' 했습니다." - 《세조실록》 권4, 세조 2년 6월 2일

이 일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柳誠源) 등이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훗날 사림들에 의해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명명되었다.

역사에서 사육신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세조를 비롯해 그의 혈통을 이어 왕위에 오른 왕들의 입장에서 사육신은 명백한 역적이었다. 또한 그들을 옹호하거나 나아가 단종 복위를 꾀하는 것 역시 반역 행위였다.

그럼에도 사림파가 득세하기 시작한 중종 이후부터 점차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실 유교적 통치이념을 강조하는 사림들에게 무력으로 친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또한 세조를 옹립하고 세조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으로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훈구파 역시 사림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사림이 역적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 복위와, 사육신의 현창(顯彰)을 주장한 것은, 유교적 명분에 입각한 사상적 투쟁이기도 했지만 다분히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엄연한 권력 투쟁이었다.

실패한 권력 투쟁의 결과로 그들은 역적이 되어 목숨을 잃었으며, 단종 역시 노산군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1457년(세조 3) 또 한 차례의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다.

이번에는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에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인 순흥에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일을 도모했던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물론 그 지역의 관리들까지 모두 죽임당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영월에 유배 중이던 단종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집현전 출신으로 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이보흠이 있는 고을로 금성대군을 귀양 보낸 것은 모의를 유도한 감이 없지 않다.

이처럼 세조의 집권 초기는 반대 세력들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으로 어수선했다. 이것은 천륜(天倫)을 거스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러나 세조와 훈신 세력은 반대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확실히 제거하여 왕권을 강력히 다져나갔다.

 

전제 군주 세조의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

반대 세력 제거에 성공한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더욱 노력했다.

우선 정부 조직을 의정부 서사제에서 육조직계제로 환원했다.

육조직계제는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시행했던 제도였는데, 세종은 업무 부담감 때문에 이를 포기한 바 있었다.

그런데 세조가 이 제도를 다시 부활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 강화에 대한 의지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조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계기로 집현전을 없애고, 여러 신료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인 경연도 폐지했다. 이로써 세종대를 거쳐 문종 대에 이르러 강화되었던 대간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었다. 대신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해 국왕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또한 국왕 중심 통치의 편의를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쳤다.

호패법(號牌法)이나 직전법(職田法)등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호패법은 태종 때 처음 실시된 제도인데 세조가 1459년(세조 5)에 다시 부활시켰다.

호패란 16세 이상 되는 남자가 차는 길쭉한 패로, 앞면에는 성과 이름, 나이와 생년의 간지(干支)를 새기고 뒷면에는 해당 관아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이 호패를 패용하도록 법제화한 것이 호패법이다.

이는 호적을 밝혀 호구(戶口)의 수를 헤아리고자 한 것이다.

 

직전법은 1466년(세조 12)에 시행된 제도로, 기존의 토지 분급 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을 고쳐 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을 현직 관료에게만 주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과전의 세습화와 관료 수의 증가로 과전이 부족해지자 신진 관료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 밖에 중앙 관료들을 지방에 파견해 중앙의 통제력을 높이는 한편 지방의 토호 세력을 억제했다.

 

또한 오위와 오위도총부를 병조의 지휘를 받게 함으로써 조선 시대의 군사 지휘 계통이 문신에게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문치주의의 폐단 중 하나였다.

세조 조에는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편찬 사업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담은 《동국통감(東國通鑑)》조선 시대 역대 왕들의 치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등을 비롯해 국가 경영의 근간이 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전제정치의 산물이었다.

이로써 세조는 재위 내내 강력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로 소외된 지방 세력들의 불만이 가중되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시애의 난으로 위기를 맞다

1467년(세조 13) 세조의 재위 기간 중 가장 강력한 위기가 닥쳤다.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길주의 토호인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조선 전기에 일어난 반란 중 가장 큰 난이었다.

회령부사를 지낸 이시애는 세조가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며 토착 세력을 억누르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함길도 절도사인 강효문(康孝文)이 길주에 순찰차 방문하자 그를 죽이고 동생 이시합(李施合)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즉시 조카인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4도병마 도총사로 삼아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의 무장들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극렬한 저항으로 난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결국 구성군과 남이의 활약으로 이시애의 반란군은 분열 끝에 자멸하고 말았다.

이시애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진압군에게 인도된 후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반란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훈구대신인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튀었다.

이시애가 강효문이 반란을 획책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노사신(盧思愼)등의 대신들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명회와 신숙주가 누구인가.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힘쓴 공신인데다 세조와는 혼맥으로 이어진 측근 중에서도 측근이었다. 그런 그들이 과연 반란을 획책했을까?

누가 봐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조는 냉철했다.

이시애가 반란의 주모자이고 한명회와 신숙주 등은 반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가택에 연금되었다. 물론 그들은 10일 만에 누명을 벗고 풀려났다.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던 세조의 정치력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시애의 반란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이후 조선의 정국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틀어쥔 훈신 세력과, 난을 진압하면서 세력이 커진 종친 세력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이시애의 반란 이후,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길도 지역은 더욱 소외되어 사실상 조선의 통치 권역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회한의 세월을 불심으로 달랜 세조

세조는 1461년(세조 7)에 불경을 간행하기 위한 임시관청인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했고, 1464년(세조 10)에는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이는 세조 이전까지의 왕들이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의지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불교 억압 정책을 펼쳤던 것과는 다르다.

 

세조는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자신을 공격하는 명분과 수단이 된 유교 대신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카와 형제 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 버리고, 위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했던 세조는, 전국의 이름난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렸다.

강원도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上院寺)에는 세조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온다.

문수보살이 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조의 몸을 씻어 주자 피부병이 나았는데, 이에 세조는 고마움의 표시로 상원사를 확장하고,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과 소리가 좋은 동종(국보 제36호)을 주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편 병이 깊어진 세조는 1468년(세조 14) 9월 7일에 환관을 시켜 경복궁에서 면복을 가져오게 하고는 세자에게 친히 내리며 "내가 병에 걸리어 오래도록 정사(政事)를 보지 못했는데, 만기(萬機)의 중함을 생각하니 마음에 더욱 근심되어 너에게 중기(重器, 왕의 자리)를 부탁하고, 한가히 거처하며 병을 치료하겠다."라고 했다.

곧바로 세자의 즉위식이 수강궁에서 치러지니 그가 바로 조선의 8대 왕 예종이다.

세조는 예종에게 선위한 다음 날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세조는 재위 내내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원혼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의경세자가 요절한 것도 원혼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데 대한 세조 자신의 인간적 갈등이 그런 전설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조의 시호는 혜장(惠莊)이고, 능은 남양주에 있는 광릉(光陵)이다.

단종의 묘
단종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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