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선돌 이야기

지명이야기

2012-08-11     용인종합뉴스

 김량장동 이야기

용인시 처인구 마평동에서 ‘김량장동’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김량장동은 용인시 처인구의 중심 지역에 있는 동(洞)으로, 동쪽으로는 내사면 송문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구성면, 남쪽으로는 이동면, 북쪽으로는 포곡면과 인접해 있다.
김량장동과 관련한 이야기는 1972년과 1977년, 1982년에 각각 채록되어 『용인군지』에 수록되었는데, 이후 2000년도에 네 차례 더 채록되어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 실렸다.

[내용]
옛날에 김량이라는 장수가 태어 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김량이 사는 곳을 축약하여 ‘김량’이라고 불렀고, 이곳에 장이 서자 ‘김량장’이라고 불렀다.
현재 용인시에는 김량의 후손이 살고 있는데, 후손들은 조상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꺼려서 김량장 대신 금양장이라고 부른다.
인물담은 그 지역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거나 특별한 연고가 있는 인물이라야 전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인물의 행위나 사건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 남게 됨으로써 전설화된다.
그 가운데 지명 유래담을 형성하는 인물은 지역적 대표성을 띠게 될 때 가능하다.
「김량장의 유래」는 김량이란 장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게 되었고, 결국 마을 이름으로 정착하게 된 사례이다.
「김량장의 유래」는 ‘김량이라는 사람이 산 곳’, ‘좋은 질의 금이 나오는 곳’, ‘쇠가 많이 나는 고개’ 등 다양한 유래가 존재한다. 또한 동일한 유형 내에서도 일정한 변이 양상을 보여서 김량이 김해김씨나 장사꾼, 상인 등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선 돌

 

[개설]
돌을 세웠거나 서있다는 의미에서 선돌 이외에도 입석(立石, 笠石)·삿갓바위[笠岩]·입암(立岩)이라고 부르며, 지역에 따라서는 구지바위·할머니탑·할아버지탑·수구막이·수살장군·돌장승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는 전사(戰士)라고도 한다.

큰돌문화[巨石文化]의 하나로 고인돌과 함께 널리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는 선돌의 수와 지역을 보면, 고인돌보다는 숫자가 적다.
선돌은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생김새는 대부분 길쭉한
돌기둥이지만 드물게 판석인 경우도 있다.
선돌의 기능은 대체로 아들을 바라거나 농경의 풍요를 바라는 기원의 대상, 그 밖에 묘표(墓表)의 기능, 벽사적(辟邪的) 존재로서의 수호 기능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선돌이 세워진 시기는 선사시대부터 근래에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청동기시대의 것이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분포]
용인시는 경기도의 다른 곳보다 선돌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포곡읍 유운리를 비롯하여 원삼면 사암리·두창리, 남사면 창리, 양지면 주북리 등지에 선돌 유적이 많이 있다. 용인에는 선돌이 세워진 곳은 논둑이나 밭둑 그리고 얕은 야산 골짜기의 입구 등으로 입지 조건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주변의 지세나 그 기능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선돌은 1기 또는 2기가 짝을 이루고 있지만, 사암리 선돌처럼 3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선돌의 기능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크기]
선돌의 크기를 보면 유운리나 두창리 것은 200㎝ 이내지만, 원삼면 창리나 사암리 것은 330㎝ 되는 것도 있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큰 편에 속한다.

[기능]
선돌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숭배 기능과 농경에 대한 풍요, 그리고 경계의 기능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처인구 남사면 창리에 있는 선돌은 쓰러지면 곧바로 마을에 재앙이 찾아온다고 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어 기원과 관련이 있다.
풍요와 연관되는 것은 원삼면 사암리나 두창리인데, 이것은 자리한 입지 조건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경계의 기능을 지닌 유운리 선돌은 현재 포곡읍 신원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런 기능의 선돌이 여주시의 석우리에도 있다.

                                              구석기시대 유물

[정의]
기흥구 언남동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산포지.

[위치]
기흥구 언남동 유적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낮은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위치해, 일찍부터 선사시대 유적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이 있어왔다.
언남동 유적은 용인향교가 위치한 구릉의 동편에 있었으나, 아파트 건설 공사로 인해 모두 훼손되었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탄천이 흐르고, 그 언저리에는 현재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북쪽에는 법화산[해발 385m]이 자리한다.
동쪽에는 경찰대학이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마북동 마을이 있다.

[출토유물]
유적지에서는 입자가 치밀한 규질암으로 만든 몸돌 석기가 1점이 채집되었다.
크기는 길이 9.6㎝, 너비 8.0㎝, 두께 8.8㎝이며, 겉면에 부분적으로 돌결면이 남아 있으나 몸돌의 원래 형태는 현재 알 수 없다.
몸돌에서 격지를 떼어낸 수법을 보면, 먼저 한 번에 커다란 격지를 떼어낸 다음, 그 면을 때림면으로 이용하여 수직한 두 면에 한 차례씩 같은 방향으로 떼기를 베풀었다.
각 면에서 떼어낸 격지의 크기는 길이 4.2㎝, 너비 3.6㎝와 길이 8.4㎝, 너비 4.5㎝이다.
수습된 몸돌에는 돌결면과 구분되는 녹이 입혀진 면이 많이 남아 있어 재활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언남동 유적은 최근 조사된 용인 지역의 구석기 유적 가운데 하나로 현재 지표 수습 조사된 상태이기 때문에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탄천 옆의 구릉지대에서 뗀석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앞으로 주변 지역에서 많은 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조사될 가능성이 있다.


남이장군 이야기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남이장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용인현읍지』나 『경기지』에는 남이 장군이 용인 사람으로 되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국조기사(國朝記事)』를 보면 남이는 권람의 넷째 딸과 혼인하게 되는데, 「남이와 귀신」은 이에 얽힌 이야기이다

[내용]
남이 장군이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한양의 외갓집에 갔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제기를 차고 있는데, 젊은 처자 하나가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빨간 보자기로 무엇인가를 싸가지고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다. 남이가 보니, 분바른 귀신 하나가 보따리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남이는 여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얘들아, 저 여자 보따리 위에 분바른 귀신이 앉아 있는데, 안 보이니?” 하고 소리쳤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게 안 보여? 잘 봐, 얼굴에 하얗게 분바른 귀신이 않아 있잖아?”라고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남이는 혼자서 여자의 뒤를 쫓았다. 여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남의 집 안까지 들어갈 수 없었던 남이는 문 밖에 서서,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집 안에서 갑자기 애고지고하면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남이는 분명 그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고는 의젓하게 대문 앞으로 나가서,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하고 소리쳤다. 곧 늙수그레한 하인이 나와서, “뉘 댁 도령인데 이 경황 중에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남이는 대뜸 “이 댁에 무슨 변고가 일어났소? 그게 궁금하니 말 좀 해보시오!” 하였다. 하인은, “어린 도령이 별일을 다 참견하시오. 이 댁 막내따님께서 갑자기 숨을 거두었소. 원 세상에 이렇게 기막힐 때가 또 있겠소? 그리도 곱고 착하던 따님이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었으니, 사람의 목숨이란 게 그리도 부질없다는 말이오.” 하면서 허탈해하였다.

남이는 혼잣말로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더니, “할아범, 속히 나를 따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시오!”라고 말했다. 하인은 “아니, 이 경황 중에 도련님 같은 분이 거기를 무슨 일로 가신다 하오?” 하고 선뜻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남이는, “일에는 완급이 있다지 않소? 빨리 안내하시오.” 하고는 더 기다릴 것 없이 뛰어 들어갔다. 남이가 안채에 들어가 방 안을 들여다보니 길에서 보았던 그 분바른 귀신이 규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를 본 남이는, “이 요망한 귀신아! 그 손을 썩 놓지 못할까?”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귀신은 놀라 달아났다.

그러자 죽었던 규수가 살아나면서 “휴, 답답해. 물 좀 주세요!” 하였다. 울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란을 떨자, 더 있기가 멋쩍었던 남이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또 죽었다면서 한 번만 더 살려달라고 붙잡았다. 남이가 복숭아가지를 꺾어 들고 방으로 가서 보니 이번에도 그 귀신이 규수의 가슴을 타고 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남이가 복숭아가지를 세차게 내리치면서, “요망스러운 귀신 같으니, 감히 뉘 앞에서 사라지지 않느냐?”고 소리치자 귀신이 두려워하며 사라졌다. 그러자 규수는 별일 없다는 듯 살아났다.

남이가 그 집을 나오려고 하자, 규수의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여보게 어디를 가려는가? 잠시 지체하였다가 대감이 퇴궐하시거든 가게나!” 하고 만류하였다. 하지만 남이가 집에서 나온 지 오래 되었다며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뉘 댁 도련님인지 함자라도 일러주게!” 하였다. 남이가 “의령위 휘(暉)의 아들이며 남이라고 합니다.” 하자, 규수의 어머니는 하인에게 집까지 바래다주라 고 시켰다. 남이가 살려 준 규수는 당시 좌상으로 있던 세도가 권람의 막내딸이었다.

그날 저녁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온 권람은 그간의 전말을 듣고 남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을 알고 막내딸과 혼인을 시키려고 마음먹었다. 권람은 다음날 점쟁이를 불러 남이와 딸의 사주를 짚어 보라고 하였다. 명을 받은 점쟁이는 “대감, 아무래도 제 명대로는 살기 어렵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허허, 그렇다면 내 딸아이는 어떤가?” 하고 묻자, “황공하오나 따님의 명운 역시 매우 짧은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도 보지 못할 것이나, 그 복만 누리실 뿐 화는 보지 않을 테니 사위로 맞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남이는 당시의 세도가였던 좌상 권람의 사위가 되었고, 11세 되던 해 무과에 장원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건위주의 야인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28세 되던 해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소인배의 참소를 받아 옥사하였다. 귀신을 쫓아 준 인연으로 권람의 사위가 되었던 남이는 점쟁이의 말처럼 명대로 살지 못했으며, 그의 부인 또한 옥사가 있기 훨씬 전에 먼저 죽었다.
권람은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았음으로 무사하였다고 전한다.

실제로 남이(南怡)[1441~1468]는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로 1457년(세조 3)인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여진을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26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예종이 즉위한 후인 1468년 유자광의 무고로 역모를 도모했다는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형을 당하였다. 비록 4백여 년이 지난 후인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직이 복직되었지만, 전설 속의 점쟁이 말처럼 남이 장군은 제 명을 누리지 못하고 짧은 생애를 살았다.
비운의 장군 남이장군의 묘는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에 잠들어 있는데 봉분은 2기로 되어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