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處仁城)전투
처인성(處仁城)전투
  • 천홍석 기자
  • 승인 2018.04.17 17: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몽고군의 지휘계통에 혼선

고려 고종 19년(1232) 12월 고려군과 몽골군이 경기도 용인의 남사면에 위치한 처인성에서 벌어진 전투.

이해 1월 제1차 고려·몽골 전쟁의 강화교섭이 성립되어 몽골군이 후퇴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의 최고 집권자였던 최우는 강화도에 천도하여,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항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6월 17일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의 다루가치 및 군인들을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에 몽골은 그해 8월 다시 살리타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고려 침공을 재개하였다. 10월 안북성에 군사를 주둔시킨 살리타는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고, 자신은 제4군을 이끌고 개경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 한양성을 함락시키고, 11월 중순에는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다.

살리타는 제4군의 주력을 강화도 맞은편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일부 병력을 거느리고 처인성으로 남진하였다.

처인성은 당시 수주(水 州:수원)에 속한 곳으로서, 양인보다 천대받던 신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둘레 약 400m의 작은 토성으로, 이때 처인성에서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각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과, 승장 김윤후를 비롯한 승병들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12월 16일 몽골군은 살리타의 지휘하에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처인성 동문 밖 언덕에 매복하여 있던 고려군은 몽골군을 기습하여, 살리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려군은 이때를 틈타 공격을 가하여 지휘관을 잃어 전열이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된 몽골군을 대파하였다.

처인성 전투는 몽골과의 전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전쟁 발발 이래 시종일관 패세를 면치 못했던 고려는,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었다.

처인성 전투는 어떤 형태였을까?

지금 남아 있는 처인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여기서 몽고군과 정면충돌을 벌일 수 있는 입지조건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록에 피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의 전투가 벌여졌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당시는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피신해 버린 뒤, 본토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을 사실상 포기해 버린 상황임을 감안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식 군 지휘관도 아닌 승려 신분의 김윤후가, 조건도 좋지 않은 성을 방어해 내기에 충분한 병력을 모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몽고군과 싸우는 방법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즉 소수의 병력을 모아 이동하는 몽고군을 기습하고 빠지는 유격전이,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처인성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이런 형태에서 특별히 예외가 될 상황은 아닌 듯하다, 사실 여러 가지로 전력의 열세에 놓여 있던 고려인들이 방어시설로 믿을만한 곳도 아닌, 처인성에서 몽고군을 맞아 싸웠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처인성 부근의 야산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몽고군을 기습 하는 형태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김윤후가 이끄는 부대가 이와 같은 기습을 가하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쏘아 댄 화살 중 하나(유사)가 살리타는 맞추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살리타가 이렇게 죽자, 몽고군의 지휘계통에 혼선이 생겼고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