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 천홍석 기자
  • 승인 2020.09.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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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1879년 9월 2일 황해 해주부(海州府)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가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 주기도 했다.

 

태어나던 무렵 집안은 수천 석을 하던 해주의 대지주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고려 말 명유(名儒) 안향(安珦)의 후예이며, 누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향반계층이었다. 선조 중에는 무반(武班)으로 이름을 높인 이가 많았다.

아버지 안태훈은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 여덟 살 무렵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했으며 열서너 살 무렵엔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사륙병려체(四六倂麗體)를 익힐 정도로 문재(文才)를 지녀 인근에서 선동(仙童)이라 일컬었다.

서울로 유학한 안태훈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으나, 당시는 개항(開港)이니 개화(開化)니 하여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던 시기였다. 이때 안태훈은 전통 유학(儒學)에만 머물지 않고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에 앞장 선 인사였다.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세력은 근대적 문물의 수용과 함께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한 인재 양성의 일환으로 개화파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년 70여 명을 선발할 때 안태훈은 그 중에 뽑힌 개화파 청년일 만큼 개화에 적극성을 띠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으니, 안태훈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조선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되었던 안태훈은 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이듬해인 1885년에 7~80명의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골인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의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청계동의 산골 마을에서 보내게 되었다. 7~8세가 되면서 할아버지의 각별한 배려로 한문 수업을 받았는데 이후 10여년간의 수학을 통해 유교경전과 조선역사에 관한 서적을 익혀 나갔다. 그러나 소년시절 학문정진에만 힘썼던 것은 아니다.

틈나는 대로 산을 타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고, 활쏘기나 말 타기와 사냥에도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청계동 집에는 여러 명의 포수들이 기식하고 있었는데, 포수들을 따라다니며 사냥이나 사격술을 익힐 수 있었다. 12세 무렵에는 말 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묘기를 부릴 만큼 능숙하였고, 15~6세가 되어서는 명사수(名射手)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

어린 소견에도 문약하기만 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업신여겨 백성이 군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라는 점점 약하여져, 만약 갑자기 외국 열강이 우리의 약함을 노려 침략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약(文弱)에서 벗어나 무강(武强)의 기품을 조성해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보다는 중국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같은 기개있는 장부로서 역사에 남기를 바랐다.

안태훈은 아들의 그러한 심지를 헤아린 뒤로는 작은 아들인 정근(定根), 공근(恭根) 등에게는 글공부를 독려해도 큰아들에게는 공부하라고 꾸짖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남다른 용맹심을 지닌 큰아들의 기백을 키우는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9세 되던 해인 1897년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수년간을 천주교 전파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천주교 신앙을 깊이 간직하게 된다.

안태훈은 천주교 선교에 앞장 서는 한편 본당 축성 사업을 벌여 산골동네인 청계동에 황해도에서는 두 번째 본당을 설치하는 적극적 열의를 보였다. 그 결과 1898년 4월에는 마렴에 있던 홍 신부(빌렘)가 청계동 본당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청계동은 황해도 포교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토마스(도마)란 영세명을 받았으며, 홍신부로부터 교리 수업 등을 받으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도 넓혀 나갔다. 20세 무렵에는 홍 신부를 수행하여 해주, 옹진 등지의 황해도 각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과 직접 접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는 ‘대학 설립’을 계획하는 한편 교인들의 억울한 처지를 대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뜨자 1906년 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사하였다. 진남포 이주는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뜻을 둔 것이었다. 상하이(上海)에서 곽 신부의 권유도 있었지만, 교육 사업은 일찍부터 가슴속에 품어 오던 일이기도 했다.

진남포에서의 첫 번째 사업은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한 일이었다. 삼흥이란 토흥(土興), 민흥(民興), 국흥(國興)을 말하는 것으로, 국토와 국민이 흥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삼흥학교의 교장을 맡았으며, 두 아우인 정근과 공근 등도 힘을 합하였다. 학생 수는 5~60명에 이르렀고, 처남 김능권(金能權)이 전답을 팔아 1만 5,000량을 기부해 학교 교사를 확장해 나갔다.

삼흥학교에서는 일반 과목 외에 교련시간을 두어, 목총, 나팔, 북을 사용하며 순군대식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 사립학교였던 삼흥학교는 뒤에 오성학교(五星學校)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삼흥학교 외에도 새롭게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면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다. 원래 돈의학교는 천주교 계통의 학교로서 해체될 형편에 있던 것을 인수한 것이었다. 돈의학교는 진남포 교당의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방(方) 신부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방 신부가 신병으로 진남포를 떠나며 해체될 상황에 놓인 것을 사재를 털어 인수한 것이었다.

돈의학교는 1907년 가을 서북 3개도의 60여 학교에서 5천여 명이 참가한 연합운동대회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둘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이 무렵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관계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1906년 10월에 설립된 서우학회는 계몽주의 단체로서 1908년 1월에 한북학회(漢北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칭하게 되는데, 서우학회에 관계했던 시기는 1907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때 국채보상금의 헌납에도 적극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이 관서지방에 파급되면서 부인 김 씨에게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장신구 전부를 헌납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의 망국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해외 망명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1907년 가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직후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여 임시사찰(臨時査察)의 일을 맡아 보면서 의병 기의(起義)의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의병 모집과 자금마련을 위해 힘을 쏟은 결과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동의회는 노령 연추(煙秋) 지방에서 국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준비단체였으며 동의회 회원은 의병과 다름이 없었다. 최재형은 당시 노령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서 의병 기의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의병부대를 결성한 뒤 국내진입작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함경북도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와 공동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독부대로 국내진입작전을 개시하였으니 이때가 1908년 6월이었다. 엄인섭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면(蘆面) 상리(上里)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교전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붙잡은 포로를 석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의병부대가 큰 타격을 입고, 엄인섭이 떠나면서 의병부대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원망의 소리가 높았다.

때문에 의병의 재기가 쉽지 않았다. 그같은 상황에서 1909년 1월(음력)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혈맹을 맺으니 단지동맹(斷指同盟)이 그것이었다. 이들이 단지동맹을 맺은 것은 당장에 의병 재기가 불가능하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단지동맹 후 주로 연추 지방에서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교육과 강연 활동을 전개하면서 의병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각 의거를 추진해 갔다. 의병 재기를 도모하던 상황에서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없었다. 즉, 자신의 활동 지역에 적장 이토히로부미가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격이었다. 이에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했다. 그리고 잠시도 지체 없이 즉각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 결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히로부미 포살을 결행하기 위해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한 것은 1909년 10월 21일이었다. 이때 이강은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을 맡고있는 김형재(金衡在)에게 소개 편지를 써 주었다. 그리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포그라니치나야 역에서 내려 친지인 한의사 유경집(劉敬緝)을 방문하고 “가족을 마중하기 위해 하얼빈 방면으로 여행하는데 러시아 통역이 필요하니 아들을 동행케 해달라”고 간청해,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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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에 도착하자 유동하에게 이토 히로부미 포살계획을 설명하고 협조 약속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대동공보』 하얼빈 지국의 기자 김형재를 찾아가 이강의 편지를 건네주었고,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합류시킬 수 있었다. 10월 23일 경에는 김형재의 소개로 일행 4명은 김성백(金聖白 또는 成白)의 집으로 안내되어 하얼빈에서의 활동계획을 논의하였다.

당초 이들은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기하고자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와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 등 네 곳에서 의거를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경비가 모자라고, 실제 가동 인원도 부족해 부득이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의 두 곳으로 한정하여 계획을 추진해 갔다.

교차역으로서 기차가 쉬는 전략적 요처인 채가구에는 우덕순, 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은 자신이 맡기로 했다. 그리고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했다. 만약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 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지하면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차에 뛰어 올라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기로 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하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유동하로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5일 아침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10월 24일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한 뒤 하얼빈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25일 아침이 아니라 하루 늦은 10월 26일 아침에 오게되어 있었다.

일본을 떠나 10월 18일 중국 요동반도의 대련(大連) 부두에 상륙한 이토히로부미는 10월 21일에 뤼순(旅順)의 전적지를 시찰한 뒤 펑텐(奉天)으로 들어가, 24일에는 푸순(撫順) 탄광을 돌아보고 10월 25일 밤 창춘(長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동일 밤 청국도대(淸國道臺) 주최의 환영회에 참석한 뒤 러시아 측에서 보내온 귀빈 열차를 타고 하얼빈 역으로 향했다.

10월 25일을 김성백의 집에서 묶고, 26일 새벽에 하얼빈 역으로 나갔다. 오전 7시쯤 하얼빈 역에 도착하니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들어가 역구내 찻집에서 이등박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채가구에서의 거행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10월 24일 채가구에 두사람을 배치하러 왔다가 하얼빈으로 돌아가면서 세 사람은 마지막 이별로 서로 포옹하고 울지 않을 수 없었는데, 러시아 경비병이 이를 보고 수상히 여겨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우덕순 ・ 조도선 등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잠가버렸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실은 특별 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출영 나온 제정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모종의 중요 회담을 한 뒤 9시 30분경 코코프체프의 선도로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출영 나온 각국 관민과 인사를 나누고 러시아 대장대신의 요청에 의해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한 이토 히로부미가 몇 걸음 되돌아서서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때 안중근은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의 후방에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브라우닝 8연발 권총으로 네 발을 발사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와의 거리는 불과 10여보에 불과했다. 세발이 정확하게 명중되었고 그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의거 직후 잡혀 역구내 헌병파출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러시아 시심재판소(始審裁判所)의 검사와 한국인 통역으로부터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당일 저녁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는 10월 28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秀太郞)의 명령에 의해 뤼순에 있는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으며, 10월 30일부터 정식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재판은 불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의 조차(租借) 지역이었으며,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따라서 일본법률에 의해 일제가 재판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목이나마 대한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제정러시아에 압박을 가해 안중근을 인도받았으며,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을 부당하게 재판한 것이었다.

일본 외상 고무라는 1909년 12월 2일 전문을 보내, 범행이 극히 중대함을 감안, 응징의 정신에 의거 극형에 처함이 타당할 것이라는 내용과 우덕순에서 대해서도 ‘모살 미수죄’를 적용할 것을 시사하고 조도선과 유동하에 대해서는 재량에 위임한다는 것을 지시했다. 즉 재판은 이처럼 고무라 외상의 지령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동양평화론』

그렇지만 생사를 초월하여 자신의 행적과 사상을 남기기 위해 집필에 열중하는 한편 2월 14일과 15일에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7통의 유서를 남겼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옥중에서 두 종류의 저술을 구상했다. 하나는 전기적 기록인 『안응칠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적 저술로서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동양평화론』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형 집행의 일자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일자를 한 달 정도 연기해 줄 것을 일제 고등법원장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일제 고등법원장이 몇 달 걸려도 좋다는 승낙을 해옴으로써 이를 믿고 공소권 청구도 포기한 채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이었다. 이때가 한달여 만에 『안응칠 역사』를 끝낸 직후인 1910년 3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과 달리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동양평화론』을 저술할 수 있었던 기간은 10여 일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공소했더라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최후작인 『동양평화론』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나, 시간을 주겠다는 일제 당국의 약속만을 믿고 공소를 포기함으로써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동양평화론』의 체계는 1서(序) 2전감(前鑑) 3현상(現狀) 4복선(伏線) 5문답(問答)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집필한 것은 서(序)와 2장의 전감(前鑑)인데 그 중 전감도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남아 있는 『동양평화론』은 서론에 해당되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옥중에서 11회 신문을 받는 동안 미조부치(講淵孝雄) 검찰관과 벌인 논쟁을 통해 『동양평화론』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있다.

미조부치를 앞세운 일본의 주요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독립할 능력이 없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되면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지므로 청일 ・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며, 청일 ・ 러일전쟁은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불기피한 선택이었다.
2. 국제공법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보호’하는 것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것이다.
3. 한국의 진보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고 있다.
4. 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한 일본의 조치가 한일협약이며 이는 합법적이다.
5. 한국의 독립과 문명개화를 가능케 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6.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살인행위를 금하고 있는 천주교 교리를 위반한 것이다.

이런 일본의 논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1. 러일전쟁의 침략적 성격, 강제한 을사늑약, 한국 황제 폐위 등 일제의 침략정책으로 한국인이 분개하고 있다.
2. 일본의 한국 ‘병합’ 야심을 열강이 좌시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으며, 이토히로부미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
3. 일본이 위생 ・ 교통시설의 완비, 학교의 설립 등을 내세워 한국의 진보를 돕고 있다고 하나, 이는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이 아니다. 명치 초년의 일본은 문명하지도 진보하지도 않았다.
4. 을사늑약은 일본 군대가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한 것이다. 을사늑약은 “형제 동지간에 있어 한편이 다른 한편을 먹이로 삼은 것”이다.
5.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조를 들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일본을 각성시키고 침략행위를 중지시키고자 한 것이다.
6.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더 큰 죄”이며 이는 결코 교리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야말로 인도주의에 반한행위이다.

그야말로 일본 측이 내세운 논리는 명백히 진실을 호도한 침략의 궤변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오해했다는 부분은, ‘정치범’이 아닌 일반 ‘살인범’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궁색하게 꾸며낸 논리였다. 그렇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으며, 일제 침략의 화근이 결국에는 만주를 비롯하여 동양으로 확대될 것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얼빈의거가 동양평화를 위한 길에서 결행된 것임을 뚜렷이 밝혔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왜 만주를 찾았는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던 시점의 만주정세는, 미국의 거센 도전을 이겨내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공조 체제가 더욱 절실하던 때였다. 일본은 남만주 지배를 위해 간도문제로 불거진 청과의 대립을 간도협약으로 진정시킨 직후였고, 한국에 대한 완전 ‘병합’을 목전에 두고 있던 때였다. 특히 러 ・ 일 양국은 무엇보다 최종 단계로서 만주 분할점령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있었다.

섬나라 일본이 제국주의를 팽창시키기 위해 만주침략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원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일본은 1904년 태프트 ・ 가쓰라 밀약에 의해 오키나와, 대만 이남의 필리핀 지역으로 진로가 봉쇄된 상황에서, 한국과 대만 정도의 식민지 경영만으로 제국주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의 만주 침략은 한국 침략에 이은 필연의 과정이자 수순이었다. 그러한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활로를 찾고자 하얼빈을 찾았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대한국의 의병 참모중장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 동양의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그리고 한국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사상과 이념은 오래전부터 구상하던 것이었다.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동양평화론』의 골간은 서양의 침략을 맞이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 일본 등 삼국이 일치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동양 평화의 범주에는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태국, 미얀마까지를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자주 독립을 유지할 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이들 국가가 일치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양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당시 동양을 침략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독립과 평화를 지키자는 것이지, 서양 그 자체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천주교 세계관을 통해서도 확인될 뿐 아니라, 일본을 향하여 침략성을 버리고 동양 평화에 동참하라는 주장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즉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데 그 기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결코 인종주의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동양평화사상은 세계평화사상과 전혀 대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듯 『동양평화론』은 국제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기반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높은 수준에서의 원리로서 동양 평화의 방도를 제시한 것이었다.

동양 평화의 구도는 대체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한 바탕위에서 한국과 청국이 정립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동양 삼국의 동등한 자격을 논의하면서도, 현실적 차원에서 일본의 주도를 인정하고 있었다. 『동양평화론』은 매우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이같이 현실적 상황을 무시하지 않는 실질적 사상성을 띠고 있었다.

동양 평화에 대한 구상은 나아가 뤼순항을 개방하여 삼국이 공동 관할할 것과 또 삼국 대표에 의한 평화회의 기구를 조직함으로써 동양 평화의 출발점으로 삼자고 주창했으며, 공동 출자에 의한 재정 확보 방안과 삼국의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 구성 등 경제, 군사 방면에까지 이르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삼국의 황제들이 로마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갖도록 하여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천주교적 세계관도 포함하어 있었다.

그러나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침략성을 막아야 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하얼빈의거는 진정한 의미에서 동양 평화의 출발이 되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일본국민을 구원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주장은, 바로 그러한 『동양평화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 평화의 기초를 이루는 삼국의 독립을 해쳐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자이므로 처단한 것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보전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한국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사상과 이념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한 것으로 『동양평화론』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은 인종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채 세계평화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때문에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하얼빈 의거는 당사자인 우리 민족 못지않게 중국에서도 절실하게 바라던 쾌거였다.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의 대가로 일제에게 영토를 분할하는 등 굴욕적 수모를 당한 바 있는데다가, 러일전쟁 당시에는 청의 발상지인 만주가 전쟁터로 화하게 되자 중국인들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야합하여 만주를 분할 점령하려는 야욕 아래 하얼빈을 방문하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럴 때 하얼빈 의거가 터진것이었다.

하얼빈 의거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 나아가 일본을 위한 의거였다. 오늘날 일본, 중국에서도 안중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 외롭게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며 동양 평화를 추구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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