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신비 고려백자', 용인에서 그 불꽃을 태우다
'천년의신비 고려백자', 용인에서 그 불꽃을 태우다
  • 용인기자협의회 특별취재단 김대열 단장
  • 승인 2019.03.19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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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일 정오, 용인 서리고려백자 연구소(소장 조광행)에서는, 천년의 신비를 자랑하는, 우리의 문화유산인 고려백자를 재현하기 위해, 명지대 용인캠퍼스에 위치한 전통장작 가마에, 용인도자기 제1호 명장인 마순관 명장과 대한민국 전통명장 제103호인 서광윤 명장이 그 황홀하고 뜨거운 장작불을 지폈다.

이 자리에는 조길생 용인문화원장과 박숙현 용인신문회장. 민심회 곽동구 회장. 더원방송. 월간도예지. 용인기자협의회. 경기e저널 등 언론사 취재진들이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하기도했다.

조광행 소장은용인 서리고려 백자연구소에서는, 그동안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의 고려백자 가마터의 신중하고 집중적인 연구와, 고려 백자를 복원하기 위해 몇년전부터 전문가들의 연구와 견해, 그리고 이동면 서리의 가마터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를 위해, 각 분과별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고 말했다.

용인 고려백자!

천년의 숨길을 느끼고, 용인이 품어온 역사문화의 깊은 정신과 예술.

지금으로부터 1천년전(9세기초~10세기)동아시아는, 당시 최고의 사치품이던 옥()을 능가하는 최첨단 하이테크인 <청자><백자>에 열광했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용인이 있었다.

용인시 이동면 서리 국가 사적 392호 요지에서는, 당시 최고 인기 상품이던 청자와 백자를 생산, 당시 청해진에 구축된 장보고의 세계무역센터를 통해, 동아시아 전역에 수출 되었다.

오늘날 세계 최첨단 제품 반도체와, 스마트폰이 용인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로 수출되듯이, 당시에는 고려백자와 고려청자가 바로 그런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1400도의 불타는 가마이후 천년 세월에 묻히고, 지워지고, 덮여 있던 용인 고려백자 요지가, 1930년대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래, 정양모 선생의 발굴촉구, 이후 호암미술관과 용인문화원의 3차에 걸친 발굴 조사와 도편 분석 등이 이뤄졌다.

이에 용인 서리고려백자 연구소는 그동안 축적된 사료와 자료를 토대로, 연구원과 도공들의 합동 토론과 기술 분석 회의를 거쳐, 20151차 복원 및 재현 시험을 이천 전통장작가마에서 실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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