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김혁장군 증손자, 백군기 용인시장,이건한 용인시의회 의장 면담
독립투사 김혁장군 증손자, 백군기 용인시장,이건한 용인시의회 의장 면담
  • 천홍석 기자
  • 승인 2019.04.06 1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혁 장군님의 유훈을 전하는데 적극적인 참여를 하겠다.”
가운데 / 백군기 용인시장
가운데 / 백군기 용인시장

2019년 4월 2일 오후 3시, 독립투사 오석 김혁 장군의 증손자 김성태씨와 증손부 이정하씨는 백군기 용인시장과의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3월 1일 용인시청 기념행사. 3월 21일 좌전고개, 3월 30일 기흥구 만세 재현, 이 모든 행사를 같이한 백군기 시장과 이들 부부는,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차 있다.

이들 부부는 증조부 김혁 장군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 날 백군기 시장은 김혁 장군의 일대기와, 업적이 담긴 사진들을 보며 김혁 장군 후손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백군기 시장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기생이신 김혁 장군님이, 저의 대 선배님”이라며, 가슴에 와닿는 위국진충 을 말했다.

증손자 김성태씨는 “증조부님께서 남기신 유묵인 천광운영(天光雲影)의 유묵이, 금년 1월 경기도 박물관에서 찾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말했다.

가운데 / 이건한 용인시의회 의장
가운데 / 이건한 용인시의회 의장

한편 증손자인 김성태씨는 “김혁 장군님이 항일무장항쟁을 위해 과감하게 간도로 넘어가신지 100주년, 조국독립의 한을 부둥켜안고 순국하신지 80주년을 기념하여, 오석 김혁 장군님의 순국 80주기 추모식에 시장님께서 발걸음 하시어, 추모사를 해주실 것을 정중히 부탁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비록 가난했지만, 시조부에 대한 자긍심만큼은 강하셨던 시어머님에 관한 이야기를 증손부가 덧붙였다.

시어머니 유품 중 지갑 속에 간직되었던 증조부 김혁 장군의 사진으로 끝없는 존경을 피하며, 이번 김혁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은 넉넉치 않은 살림에, 제례 추모의 예를 못 다 했던 시어머님의 정성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백군기 시장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세요.” 라며 “김혁 장군님의 유훈을 전하는데 적극적인 참여를 하겠다.” 며 오석 김혁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을 의전으로 모실 것을 약속했다.

이날 증손자 부부는 백군기 시장의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에 눈시울을 붉혔으며, 시어머님의 부재에 위로를 받고, 장례식 때 받았던 백군기 용인시장 근조기를 소중하게 포장하여 돌려주었다.

독립투사 김혁장군
독립투사 김혁장군

독립투사 오석 김혁 장군 (1875~1939)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이다.

대한제국 육군정위(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9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 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에 산업의 진흥과 아울러 무력투쟁을 계획하여, 백두산 아래 화룡현(和龍縣)에 자리잡은 대종교 총본사(大倧敎總本司)와 백두산 동북쪽인 왕청현(汪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던 흥업단(興業團)의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봄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 일(徐一)과 경리담당인 계 화(桂和)가 계속 병력증강에 힘써, 백초구(百草溝)기타 각지에서 약 300여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또 이성규(李成奎)를 국내로 보내어, 대한제국시대의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홍충희(洪忠熹)김찬수(金燦洙)박형식(朴亨植) 등을 동반하여 올 때, 그도 유우석(柳佑錫)과 함께 무송현(撫松縣)으로부터 와서 북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2830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한교회(韓僑會), 대한광복단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북독판부대표 및 통군부 대표 등 8개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하여 조직된 통의부(統義府)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사령장 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군에게 쫓겨 노령지역으로 갔다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겪은 후, 1924년 초에 북만지역으로 돌아와 현천묵(玄天默)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고, 조성환(曺成煥나중소(羅仲昭김규식·이장녕·김 필(金弼권영준(權寧濬) 등과 함께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북만 영안현(北滿寧安縣)에서 재야혁명가들을 모집하여, 전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동년 310일에는 발해의 고지(故地)인 영안의 성내(城內)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민사부위원장인 최 호(崔灝),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허 빈(許斌), 연락부위원장 정 신(鄭信),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 돈(金墩)과 함께 재만동포의 안정과 대일항쟁을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穆陵縣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에 임명되어 부교장 김좌진, 교관 박두희(朴斗熙오상세(吳祥世백종열(白宗烈) 등과 함께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72월에는 중동선 석두하자(中東線石頭河子)에서 경리부위원장 유정근과 본부직원 김윤희(金允熙박경순(朴敬淳한경춘(韓慶春남중희(南重熙이종순(李鍾淳)이정하(李正河고문 남 극(南極) 등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96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강남대학교 옆 주택단지에는, 사람 이름을 딴 작은 공원이 있다.
김혁공원'. 야산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조성된 이 공원의 애초 이름은 딱딱한 공문서 잉크냄새가 풍기는 '구갈 근린 2공원'이었다.
용인시는 지난해 3월 구태의연한 공원 명을 버리고, 이 고장 출신 무장 독립운동가 오석(吾石) 김혁(金赫.1875~1939)장군의 이름을 과감하게 공원이름으로 채택했다.

김혁장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은 모든 국민들이 단군교를 신앙하는 대종교적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장교였던 김혁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1914년 대종교에 입문해 참교(參敎)와 지교(知敎)를 역임했다.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대종교에,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김혁이 참여했다는 것이 기념사업회의 설명이다.
김혁 장군은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이나, 그 활동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활동상은 2001년 그의 후손과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오석 김혁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이듬해 국가보훈처 주관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고, 연구논문과 신문보도, 투옥 기록 등을 묶은 자료집이 나오면서 주목을 받았다.

김혁 장군의 손자 김진모(60)씨는, 중국 내 대학 연구실과 신문사 자료실을 뒤지고 현상금까지 내걸며, 조부를 발자취를 추적한 끝에, 어렵게 역사의 퍼즐을 맞췄다.
남아있는 사료가 말해주듯, 1985년 선산에 세우려던 기념비도 당국의 무성의와 택지개발로 이러저리 옮겨다니다, 1999년에야 지금의 공원 터에 자리잡았다.

지금은 삼성전자가 들어선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태어난 그는,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정위(正尉.지금의 중령급)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압력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김혁은 독립운동의 길로 당시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선택했고, 대종교가 일제 강점기에 백두산 일대 만주지역으로 활동지역을 옮기면서, 김혁도 이를 따라 대종교도로 활동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김혁은 용인으로 돌아와 용인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검거령을 피해 다시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도 그의 그림자가 감지된다.
만주에서 그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흥업단과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군사단체. 북로군정서에서의 활동이 기록으로 발견되지 않으나, 그의 경력으로 미뤄 군사 자문이나 장교 양성에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1928년 당대 최고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만든 신민부의 총회 장소에서 체포된 뒤 징역 10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마을로 순행 나갔던 김좌진 장군은 화를 면했다.
모진 고문을 받고 7년 만에 가 출옥했으나,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19394월 농서리 자택에서 순국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