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전 용인시의원의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의 발자취
이건영 전 용인시의원의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의 발자취
  • 천홍석 기자
  • 승인 2022.06.07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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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

지난달 24일 이건영 전 용인시의회 의원은 용인이씨 이사회를, 중시조인 이중인(1315-1392)묘소가있는,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사당에서, 이건규 종친회장을 비롯한 80여명의 종친들과 함께했다.

중시조인 이중인은 고려말에 문화우시중을 지냈으며, 구성부원군에 제수되기도했다.

태조 이성계가 이중인을 구성백으로 봉하였으나, 불사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분이다.

이건영 전 의원은 “저는 중시조의 21대 후손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용인이씨 종친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해봅니다.”라며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다음은 이건영 전 의원이 말하는 중시조 이중인의 살아온 삶이다.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 묘(용인시향토유적 제60호)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 묘(용인시향토유적 제60호)

1-이중인 (李中仁)

♣고려말의 충신으로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문하시랑(門下侍郞)평장사(平章事)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용인이씨 중시조이다.

출생-사망 : 1315 ~ ?

본관 : 용인(龍仁)

호 : 주초(奏楚)~진초(秦楚)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정치

본관은 용인(龍仁)

호는 주초(奏楚) 또는 진초(秦楚)이다.

고려문화시중 구성부원군 용인 이공휘종인지묘
고려문화시중 구성부원군 용인 이공휘종인지묘

아버지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지낸 이광시(李光時)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이후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등의 관직을 지냈다. 학문이 매우 뛰어나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이색(李穡, 1328~1396)도 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조선 개국 후 두문동 72현(賢)의 한사람, 조선 태조(太祖)가 국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도 거절하였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에 있으며,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삼귀마을에 있는 송산사(宋山祠)에 배향되었다.

용인이씨(龍仁 李氏)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 묘석
용인이씨 중시조 이중인 묘석

경기도 용인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시조 이길권(李吉卷)은 용구(龍駒)의 토호(土豪)로서, 고려조(高麗朝)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책록되었고, 구성백(駒城伯)에 봉해졌다.

14세손 이중인(李中仁) 선대산소들이 모두 실전되었고, 이중인의 아들 이사위(李士渭)가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개성 유후(開城留後)에 이르자,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이중인(李中仁)을 중시조로 한다.

추원사는 용인지역 토호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용인이씨 시조인 이길권(李吉卷)이래, 13세 평장사 이광시(李光時)와 판도판서 문하평리 이광봉(李光逢)형제까지 13세 14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이중인 선생은 용인이씨 13대손으로 용인이씨의 중시조가 되는분이다.

2-이사위(李士渭)

용인향토유적 제63호 이사위 묘
용인향토유적 제63호 이사위 묘

본관은 용인(龍仁)

증조부는 지후(祗候) 이석(李奭)이고, 할아버지는 판서(判書) 이광시(李光時)이다.

아버지는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 충숙공(忠肅公)이중인(李中仁)이다.

문효공(文孝公) 전신(全信)의 외손이다.

형제로는 전서(全書)를 지낸 형 이사영(李士潁)과 지주사(知州事)를 지낸 아우 이사이(李士彛)가 있다.

아들은 이백지(李伯持)이다.

공은 일찍이 신진사(新進士)1360(공민왕 9)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공의 나이 18세였다.

대언(代言)과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역임하였다.

1390(공양왕 2)에 왕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을 때,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이듬해에는 좌부대언(左副代言) 동왕3면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使)가 되어 목민관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색(李穡)과 친교가 있었으며,목은집(牧隱集)에 그에 관한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개국 후 두문동 72()의 한사람인 아버지 이중인의 뜻에 따라, 불사이군(不事二君-새로운 왕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말라)의 유지를 받들려 했으나, 유민들의 간곡한 원류(願留)를 뿌리치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음을 아쉬워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지는 못하였으나, 일신에 부귀영달을 꾀하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았다.

조선(朝鮮) 개국 초기에 개성유후(開城留後)룰 지냈으며, 청백리공 이백지(李伯持)의 부친이기도 하다.

묘는 원형 봉토분으로 묘석과 상석, 향로석, 문인석, 망주석이 1쌍이 있으며, 묘표는 월두형(月頭形) 비신과 비대를 갖추었다.

건립연대는 1705(숙종 31)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1396(태조 5)도성(都城) 감역관(監役官)인 전 사재감(司宰監) 박리(朴理)가 군인을 시켜서 큰 돌을 운반하게 했는데, 길이 좁아서 전 밀직(密直) 이사위(李士渭) 집의 울타리를 걷어치우니, 사위가 박리를 때리고 욕설을 하였다.”하여 형조에서 상소를 하여, 순군옥에 갇혔다가 곧 석방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고매곡에 있다.

(변천) 200934일 용인시 향토유적 제63호로 지정되었다.

3-이백지 (李伯持)

이백지 묘 ​이백지 묘 용인시향토유적 제57호 ​
 ​이백지 묘 (용인시향토유적 제57호)​

시대 : 조선

출생 : 1361년(공민왕10)

사망 : 1419년(세종1)

경력 : 성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직업 : 문신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 용인(龍仁)

▲조선전기 성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아버지는 이사위(李士渭)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 동진사(同進士: 丙科에 해당) 제12위로 급제 하였다.

1409년(태종 9) 성주목사로 재직하면서, 백성을 동원하여 관둔전(官屯田)을 경작하도록 하였다가, 경차관(敬差官)에게 적발되어

중도부처(中途付處: 유배도중 죄의 가벼움으로, 도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형벌제도)되었다.

1419년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병으로 사임한 뒤 그해 12월에 죽었다.

조정에서 종이 70권을 치부(致賻)하였다.

제실-추원사
제실-추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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