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 남 용인서울병원 이사장
이 제 남 용인서울병원 이사장
  • 천홍석 기자
  • 승인 2013.11.0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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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의료 경영인
용인서울병원 이 제 남 이사장
용인시 처인구 유림동에 자리한 용인서울병원 이제남 이사장은, 의료법인 효심의료재단 용인서울병원과, 의료법인 효성의료재단 용인요양병원을 설립하게 된 배경과, 매년 백미를 수백kg 사회 저변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후원하고 있고, 또한 지속적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이제남 용인서울병원 이사장을 만나 그의 인생 역경과 경영철학을 들어 보았다.
천홍석기자chs5761@hanmail.net

“봉사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새벽에 인력시장에서 막노동 시작

 

▶용인서울병원을 설립하시게 된 동기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일을 하시다 손목의 뼈가 탈골된 적이 있었습니다.
병원도 없고 약국도 없고 뭐 의료 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갇혀진 섬 생활 환경 속에서 변변한 치료를 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민간요법 인지, 아니면 무식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긴지, 남의 말을 무작정 믿는 할머니의 무지의 탓인지, 개똥을 아픈 부위에 바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고작 치료라고는 개똥을 개서 손목에 붙인 게 전부였습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뒤틀린 손목으로 불편하게 지내시다 그냥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바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섬을 벗어난, 다른 세상을 전혀 몰랐던 저는 그때 결심 했습니다.
우리 할머니처럼 저런 큰 병(?)으로 죽는 사람, 저런 모습으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그래서 꼭 의사가 되어야 겠다고.... 그냥 어린 마음에 막연히 의사라는 직업을 동경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배움의 시기를 놓쳐, 의사의 길과 거리가 먼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 사업을 하에 되었지만, 지금은 의사가 아닌 전문 경영인으로서, 어린 시절의 막연한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병원의 경영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원을 운영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의사의 면허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진정으로 환자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연민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닐까 생각 합니다.

 
▶병원의 경영철학과 인생철학 이라면?
♣제가 막 건축업에 뛰어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20대 초반 대학을 다니며, 건축업에 뛰어 들어 「건축의 밑바닥 생활을 모르면 건축업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집념으로, 모든 것을 발로 뛰어 다니며 손수 만들어 보고 배웠습니다.
명색이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주위 사람들이 핀잔이 싫어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가 막노동부터 시작했습니다.
건축에 해당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않고 직접 해보고 익히고, 배우고를 반복하며, 항상 모든 문제에 “저건 왜 저렇게 밖에 할 수 없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이제 건축이라면 막히는 것이 없을 만큼 저만의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벽돌을 쌓아 건물을 올리기 이전에 벽돌 만드는 법을 익혔고, 골조 작업을 배우기 이전에 모래를 등짐으로 지어 나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저의 소신이고 철학입니다.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알 수도 그리고 믿을 수도 없다”몸소 느끼고, 체험하고 또 실패하고 다시 시도해서 얻은 지식만이 참 지식이며, 반드시 그 지식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제 나름대로의 생각이고 그 생각대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때도 ‘외형보다는 깊이 있는 내실’을 중시했던 경영방침 덕에 흔들림 없이 버텨왔습니다.
병원 경영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전 국민의 의료 보험화로 의료 환경이 날로 열악하여, 의사들만의 성역으로 여겨졌던 병원들이 무너지고 또 도산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런 현상에 대하여서도 저는 의료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부터 변화해야하고, 스스로 자성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의료 행위와 경영이 분리되어, 중소 병원도 전문 경영인 출신들이 운영하는 세상이 반드시 도래하겠지만, 이제라도 전문 의료인들이 의식을 전환하여 고객의 입장에서, 환자 중심으로 한발 더 다가선다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그 수익을 사회에 다시 환원시켜 얼마든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뜻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 입니다.
매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의료 환경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말하고, 노력하지도 않고, 몸을 낮추지도 않고, 현실이 어렵다고만 푸념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일부 의료인의 생각에 대하여 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불가능한 일도 스스로 극복 하여야 하고, 몸으로 실천해 나가며 익히고 배우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영원히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게 제 생각이고 소신입니다.
 
▶서울병원의 문지기 이사장으로 소문 나 있는데?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 정문에 항상 서서, 오가는 고객들과 수시로 인사하고 대화 하는 것을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즐기고는 합니다.
고객 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생각지 못한 것도 알게 되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듣는 것이 저의 작은 행복입니다.
용인에서 최고인 병원도 좋지만, 지역 주민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병원으로, 의료의 질적 서비스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병원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참봉사의 의미를 각인 시킬 수 있는 병원으로 거듭 나는 것이 제 남은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저희 병원 정문에 늘 서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삶이, 우리 직원들, 자라는 학생들, 그리고 힘없고,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자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꿈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데 작은 밀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성장 과정과 배경은?
♣전라남도 완도군이 제 고향입니다.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더 들어가면 고금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깡촌 , 섬마을 그 곳이 제가 태어난 고향 입니다.
지금은 많이 발전하고 다리를 놓는 공사를 하고 여러 가지 시설도 들어오고 했지만, 나이 지긋하신 분들께서는 잘 아시다시피 50년대 시골 그것도 섬이라는데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을까 하는 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8남매 중 6남으로 위로는 형님들, 누나, 아래로는 동생들 또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말 그대로 옹기종기 대가족이 마을을 이뤄 사는 전형적인 과거 우리의 시골 촌마을입니다. 바다를 땅으로 알고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 아니 지긋 지긋하게 가난해 한발로 서있을 땅 한 평 갖지 못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바다의 끝이 어딘지, 땅의 시작이 어디 서부터인지 분간하지도 못하는 그저 철없던 깡 촌놈, 그 자체였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사는 곳이 섬이기 때문에 과일이 무척 귀했는데, 하루는 수박이 먹고 싶어 어머님께 수박을 사달라고 떼를 쓰니, 결국 어머님이 물주전자를 내주시며 그 속의 물을 다 마시면, 수박을 사주시겠다는 말씀에 억지로 그 물을 마시신적이 있었습니다.
물을 다 마시고 나니 정작 수박은 먹을 수조차 없었는데, 그때는 왜 그리 먹고 싶은 것도 많았는지, 그리고 그때 왜 어머님의 표정이 밝지 못하셨는지 생각해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음이 저미어 옵니다.
그때 지금처럼 흔하디흔한 수박 한통을 자식에게 먹일 수 없었던, 제 어머님의 고통을 이제야 개달았으니 말입니다.
 
약 40년 전쯤 일이네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일푼으로 상경해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에 막 상경하는 저의 손을 꼭 잡으시며 “어느 누가 너에 뺨을 때리거든 네 뺨이 아프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네 뺨을 때린 사람의 손이 얼마나 아플까 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일정한 거처도, 학비도, 연고도 없이 상경한 70년대 초 서울 생활, 그땐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지금도 잘 모를 정도입니다.
하루 왕복 200원이던 차비가 없어, 부평 공단에서 서울역까지 고속버스로도 40여분이 소요되던 거리를, 시골에서 걸어서 다녔던 철없는 생각으로 무려 5시간이 넘게 걸어서 도착했던 기억.
그리고 다시 서부병원까지 2시간이 넘게 걷고 또 걷고....참 지겹게 걸어 다녔습니다.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끝내 고등학교를 그만 둬야 했습니다.

그래도 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학원 청소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 했고, 또 악착 같이 벌어서 대학도 다녔습니다.
그 때의 고생과 괴로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때 그 모든 것이 저를 강하게, 그리고 검소하게, 무작정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게 했을지 모릅니다.
참고 견디고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가지면 생활고로 인해,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포기했던 일들이 정말 기적같이 이루어집니다.

 
▶지역사회 봉사활동은?
♣저는 세상을 너무 힘들게, 그리고 어렵게만 살아왔습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습니다.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어디만큼 달려왔는지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그저 달려야만 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 왔습니다.
물론 지금 까지 병원을 운영하면서 얻은 매출의 1%를, 사회에 환원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살아왔고 실천에 옮겨왔지만, 어느새 한 비영리법인인 병원의 대표자로서 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저보다 불우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이 진정으로 눈에 보입니다.
이제야 남에게 베푸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조금씩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여느 부모들과 같이 남들이 쉴 때 고기를 잡고, 김과 미역을 따고, 남들이 먹을 때 아끼고 굶고를 반복하며, 그 많은 자식들의 교육에는 남달랐던 부모님들. 지금 저에 위치는 저에게 인내를 깨우쳐준 고향과, 모두 부모님의 희생 덕임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늘 부모님을 공경할 것을 주문하고 강조 합니다.
어느덧 굴곡으로 점철된 인생 속에서 한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줄곧 듣기는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걸 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뒤안길에서 남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 조금이나마 남을 위해 봉사하고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남은 소명으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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