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선생의 충효사상 기려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회생시키려다 개성 선죽교에서 희생되었다.
그떄 나이 56세였다. 순절한지 9년 후에야 비로소 선생의 충절과 학문이 인정되었다.
조선 태종 즉위년(1401)에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의 작훈을 내렸다.
태종6년(1406) 3월에는 개성의 해풍(풍덕)에 평장 하였던 묘소를,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본래는 포은의 면례지가 능원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포은 선생이 신원(伸寃)되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장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면례행렬이 지금의 수지읍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신기한 일이 생겼다.
앞에 내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라 가 버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면례꾼들이 따라가 보니 그 명정은 지금의 묘역에 떨어졌다.
지관을 불러 확인 해 보니 보기 드문 명당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숙의한 끝에 포은선생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장례를 모시기로 하였다. 오늘날 능원리는 영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포은선생의 묘소와 관련된 지명으로 수지읍에 풍덕내가 있다.
이는 본래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신다'의 뜻인 '來'가 후대에 '내(川)'로 변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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